“물음표의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앞치마를 벗지 마세요.”-대한민국 제과 명장 제12호 인재홍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 2024-12-30 11:51:17

인재홍 대한민국 제과 명장은 제과 제빵 기술자의 삶을 ‘수도승의 삶’에 비유하곤 한다. 새벽에 일어나 작업하고, ‘오늘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 명장은 오늘도 가운을 입고 공장에 들어서며 스스로를 이겨낸다.

인재홍 명장은 지난 2017년, 12번째로 대한민국 제과 명장에 올랐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현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현장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한다고 말한다. 인 명장이 말하는 현장이란 바로 밀가루 가득한 작업대 앞, 뜨거운 열기가 나오는 오븐 앞이다. “오갈곳이 없었던 그 꼬마가 오늘날 이렇게 맛있는 빵을 만들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서 명장이 되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제과 제빵 기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은 우리에게 무기 같은 거예요. 무기 다루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서 늘 현장에 머물려고 노력합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걸 간과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습니다.” 오늘날의 명장 인재홍을 존재하게 한, 빵을 향한 그의 애정. 제과 제빵을 업으로 삼게 된 우연에 대한 감사에서 기인한다고 그는 말한다.


목표는 또 다른 시작

인재홍 명장이 빵을 처음 접한 건 그가 15살 때였다. 숙식하며 일하던 중국집이 사장님의 사정으로 문닫게 되자 하루아침에 오갈 곳이 없어진 그에게 손을 내민 건 중국집 건물 1층의 빵집, 서울 신림동 ‘독일제과(‘레피도르’ 전신)’의 사장이었다. “중국집에서 일하던 걸 눈 여겨 보셨는지 본인 빵집에서 일해보라며 기회를 주셨어요. 아직도 그 날짜가 잊히지 않아요. 1978년 10월 23일, 독일제과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제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됐지요.”

소년 인재홍이 빵 반죽과 반죽 성형에 익숙해질 무렵, 독일제과에 한 기술자가 찾아왔다. ‘나폴레옹 과자점’에서 근무하던 독일제과 사장의 후배였다. 그는 선배의 부탁으로 종종 독일제과를 방문해 기술을 전수했다. 그가 선보였던 기술은 인재홍 명장에게 충격이었다. “처음부터 케이크를 몇 개 만들지 계산해 재료를 계량하고, 케이크 반죽 중량을 달아가며 팬닝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당연한 건데 왜 충격이냐고요? 그때는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죽이 남으면 남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만들었거든요. 그 당시 나폴레옹 공장장이었던 권상범 명장님이 일본에서 연수하고 막 돌아왔을 시기라 나폴레옹에는 선진 기술이 많이 도입됐다고 하더라고요. 목표가 생겼어요. 나도 나폴레옹에 가야겠다고.”

허나 빈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의 기다림 끝에 인재홍 명장은 나폴레옹 명찰을 달게 된다. 그에게 목표의 다른 말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많이 배워 더 넓은 곳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18세 인재홍은 ‘많이 배우리라’는 두 번째 목표를 세운다.

성공하는 원칙

많은 명장들이 나폴레옹이라는 제과점을 거쳤다. 또 제과계에서 이름을 알리는 기술자들 역시 나폴레옹 출신이 많다. 이를 두고 나폴레옹을 ‘제과 제빵 사관학교’라 칭하기도 한다. 인재홍 명장은 나폴레옹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켜야 할 원칙과 규칙이 많았던 곳이기에 그 곳을 견뎌낸다면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정신력을 입증한 셈이기 때문이다. “연좌제가 있었어요. 반죽 담당자가 잘못하면 그에게 반죽을 알려준 고참, 내가 일을 물려줄 후임이 다같이 기합을 받는 거죠. 내가 아픈 건 괜찮은데 선배와 후배가 같이 피해를 보는 게 너무 싫었고, 다들 그런 마음에 더 이를 악물고 일했죠. 그렇게 엄격한
곳에서 실수가 나올 리 있나요. 혹여 있더라도 무조건 전량 폐기죠. 좋은 재료 사용, 공정 지키기, 그리고 소량을 반복적으로 생산해 매장에는 늘 따뜻한 빵을 준비하기. 나폴레옹이 장사가 잘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이를 학습한 기술자들이 독립해서도 인기 있는 빵집을 운영할 수 있었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입니다.”

나폴레옹에서 보낸 3년은 그를 원숙한 기술자로 만들었다.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부산의 ‘모짜르트’ 제과점에 스카우트되어 일한 후 드디어 자신의 빵집, ‘인스베이커리’를 서울 봉천동에 오픈했다. 그간 쌓은 탄탄한 기술력 덕분에 장사는 잘 됐지만, 동네 골목에 위치한 6평 남짓의 1인 빵집은 그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줬다. 맛있는 빵, 즉 잘 팔리기 위한 빵을 만드는 시스템을 갖추려면 번화가에 위치해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재홍 명장은 틈틈이 상권을 공부하고, 일본을 방문해 베이커리 카페 트렌드와 시장성을 살폈다. 도전은 깨달음을, 그리고 깨달음은 늘 새롭고 더 나은 길로 인재홍 명장을 이끌었다.

촉을 잃지 말자

2017년 경기도 평택에 베이커리 카페 ‘빵과 당신’을 오픈하던 해, 제12호 대한민국 제과 명장이 된 인재홍 명장은 기술인이 인정받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베이커와 파티시에가 각광받는 직업으로 떠오른 지 몇 년, 제과 제빵 기술에 쏠린 관심이 찰나의 순간이 되지 않도록 대학교 출강 등을 통해 꾸준하게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좋은 선배이자 롤모델이 되기 위해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적어도 ‘아 저 사람처럼만 하면 언젠가는 나도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초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기술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촉을 잃지 않기 위해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요. 제가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말로 이번 인터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모자 벗으면 앞치마 벗고 싶고, 앞치마 벗으면 가운 벗고 싶다.’ 가운 벗으면 기술자로서 생명도 끝입니다. 현장이 허락하는 한 현장에서 답을 찾는 살아 있는 기술자로 남고 싶습니다.”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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