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잃지 말아야 할, 초심”-대한민국 제과명장 2호 임헌양 명장
베이커리뉴스
bakery@bakerynews.co.kr | 2024-09-24 16:23:52
우연에서 시작된 인연
고등학교 시절, 배구 선수로 활동했던 임헌양 명장. 하지만 당시 스포츠의 길은 극소수만이 걸을 수 있었고, 임헌양 명장은 그 길에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어 남산에 올라갔고, 서울을 내려다보며 ‘시켜만 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했어요.” 그의 간절한 마음을 하늘이 알아준 걸까? 그는 우연한 기회로 미 8군 기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제과 제빵’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운동만 했던 그가 제과 제빵에 대해 알 일은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켜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던 남산에서의 다짐을 잊지 않고, 허드렛일부터 열심히 시작했다.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더니 이제 빵 만드는 법도 알려주더군요. 빵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는 내가 만든 밀가루 반죽이 도넛, 케이크 등 예쁘고 맛있는 빵으로 변하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있고,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임헌양 명장과 제과 제빵의 인연. 그는 그 시작을 회상하며 특히 ‘도넛’에 대한 추억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 땐 재료가 풍부하지 않아 정말 기본적인 재료들로 만들었는데, 전혀 화려하지 않은 그 빵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냄새부터 맛까지 정말 황홀했답니다. 지금도 베이커리에 가면 도넛을 사곤 하는데, 그 때의 맛은 나지 않더라고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다시 맛보고 싶네요(웃음).”
대기업 회장을 이긴 신념
이후 임헌양 명장은 1970년 ‘조선호텔’에 입사했고, 1977년 ‘신라호텔’이 문을 열면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눈에 들었던 임헌양 명장은 그의 간식을 전담했다. “이병철 회장님은 입맛이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셨어요. 그래서 재료부터 꼼꼼하게 신경썼죠. 특히 회장님은 일본에서 전량 수입했던 ‘호프빵(맥주 원료인 호프를 넣어 만든 빵으로, 쌉싸름한 맛이 특징이다.)’을 좋아하셨는데, 직접 만들어 드리려고 시도해봤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어요.”
임헌양 명장은 실패 요인을 알아내고자 곧장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레시피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깨 너머로 호프빵 만드는 모습을 세심하게 살펴보던 그는 실패 요인이 ‘재료’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강력분, 박력분 구분없이 ‘CJ제일제당’에서 나오는 밀가루 1가지가 전부였어요. 그런데 그 밀가루론 제대로 된 호프빵을 만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회장님께 캐나다산 밀가루를 수입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기술 없는 놈이 재료 탓만 한다’라며 꾸짖으셨어요.” 계속된 임헌양 명장의 부탁에 이병철 회장은 직접 일본 기술자를 데려왔고, 임헌양 명장과 같은 재료를 주고 대결을 펼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일본 기술자는 호프빵을 만들지 못했고, 임헌양 명장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결국 신라호텔은 캐나다산 밀가루 수입을 시작했고, 임헌양 명장은 드디어 일본 현지의 맛을 재현할 수 있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속담처럼, 빵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료는 모든 빵을 만드는 시작점이죠. 재료가 신선하지 않고, 맛이 없다면 결코 맛있는 빵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재료의 중요성을 잘 아는 만큼 그는 절대 재료에 있어서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한밤 중 걸려온 전화
이병철 회장과의 일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임헌양 명장의 일상은 매우 바빠졌다. 대통령 취임식부터 생일, 88’ 서울올림픽 등 주요한 행사의 빵들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 중 임헌양 명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일 케이크를 가장 잊지 못할 케이크로 꼽았다. “한밤 중 전화가 울렸어요. 전화한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는데, 아침까지 대통령의 55세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달라고 하더군요. 주어진 시간이라곤 한나절 남짓이었지만 급하게 아이디어를 짰습니다.” 그는 오각형 모양으로 5단 케이크를 만들어 재치있게 55세를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편안한 자세로 케이크를 자를 수 있도록 영부인이 신을 구두 굽의 높이까지 철저하게 계산해 케이크를 완성했다.
대중을 위한 연구가
임헌양 명장은 1983년, 신라호텔에서 분리된 ‘신라명과’로 옮겨 최근까지 신라명과의 계열사였던 ‘브레댄코’에서 활동했다. 그는 브레댄코의 기술 고문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시도했다. ‘탕종법’은 그 연구 끝에 나온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더욱 쫄깃한 식감의 빵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다 밀가루에 끓는 물을 넣어 반죽을 했는데, 떡처럼 쫄깃하면서도 탱글탱글하고 부드럽기까지 하더라고요.” 이와 함께 그는 빵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발효종을 연구했고, ‘된장발효종’과 ‘청국장종’을 개발했다. 탕종법과 두 가지 발효종의 조합으로 완성된 빵들은 고객들은 물론 업계 관계자들의 큰 관심을 얻었다.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고객이 되어 빵을 사러 갑니다. ‘탕종 식빵’을 비롯해 모든 제품들이 처음 그 맛 그대로 잘 유지되고 있어 뿌듯합니다(웃음).”
‘명장’이란 무엇인가
끊임없는 연구로 까다로운 대기업 회장은 물론 대통령, 국민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임헌양 명장. 이러한 노력들이 바탕이 되어 그는 2001년, ‘대한민국 제과 명장 2호’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명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현장 시연과 면접 등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했고, 경쟁률도 만만치 않았다. 임헌양 명장 역시 그때를 떠올리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매우 어려운 길을 지나왔기 때문에 명장 타이틀을 얻은 순간, 굉장히 기뻤습니다.”
임헌양 명장은 제과 제빵 업계의 최고 자리에 올랐음에도 독립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매장을 열지 않고,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만든 레시피를 나만 간직하지 않고, 많은 후배 기술자와 공유해 널리 퍼뜨리는 것이 제과 제빵 업계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명장은 업계 전체의 발전을 위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기술 고문의 자리에서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초심’
임헌양 명장은 바쁘게 달려온 60년 제과 제빵 인생을 마무리하고, 현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인터뷰 마지막,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좋은 재료, 정확한 공정, 따스한 정성. 저뿐만 아니라 많은 후배들도 이 3가지를 마음 속에 품고 제과 제빵을 시작했을 겁니다. 처음 다짐했던 그대로,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어릴 적 마음에 새긴 ‘최선’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한 길을 걸어온 임헌양 명장. 제과 제빵 업계를 위해 묵묵히 노력한 그에게 진심을 담아 존경의 마음을 전해본다.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베이커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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