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아닌 몸으로 받은 신뢰”-대한민국 제과명장 3호 권상범 명장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 2024-09-24 16:31:22

깔끔하게 다려진 위생복을 입고 사무실로 나선다. 제과 제빵을 시작한 지 어언 60년이 흘렀지만 오늘도 그는 책을 펼친다. 말이 아닌 몸으로 전했던 대한민국 제과명장 3호 권상범 명장의 진심을 고이 담아본다.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권상범 명장.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생계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배고픔’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했다.

17살이 되던 해, 권상범 명장은 가족들과 함께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외가로 갔다. 당시 외삼촌은 다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제과 제빵 인생이 시작됐다.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다과점에서 빵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재미를 느꼈거든요. 그땐 앙금빵, 소보로빵, 크림빵 3가지만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할 정도로 맛있었어요.” 1년 간 외삼촌의 다과점에서 일하던 그는 본격적으로 빵을 배우고자 대구로 떠났고, 그로부터 다시 1년 후 단돈 2000원을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몸으로 보여준 진심

기술자 시절 권상범 명장(오른쪽)

서울에서의 첫 직장은 ‘성림제과’였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일했고, 숙소가 없어 빵 굽는 화덕 위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고된 하루하루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제과 제빵이 그에겐 행복과 재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장장의 거친 말은 그를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무작정 그곳을 나왔다.

보름 간의 방황 끝에 ‘풍년제과’에 들어간 권상범 명장.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모두가 떠난 작업장에 남아 홀로 청소를 하는 등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이를 본 점장은 2000원이었던 그의 월급을 한 달 만에 3000원으로 올렸다. 이후 그는 반죽부터 케이크 데코레이션까지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히며 차근차근 성장했다. 그리고 7년 뒤 스승이었던 故 김충복 선생의 추천으로 ‘나폴레옹’ 공장장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나폴레옹에서도 그는 결코 쉬는 법이 없었다. 케이크 300개 주문에도 홀로 직접 아이싱 작업을 하고, 틈나는 대로 언어 공부는 물론 제과 제빵 공부까지 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던 날, 나폴레옹 사장은 그에게 동경제과학교 연수를 권했다. 연수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지원해주겠다며 말이다. 배움을 좋아했던 그는 곧장 일본으로 떠났다.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수업에 충실히 임했고, 시간을 쪼개 일본의 빵집이란 빵집은 모두 찾아갔어요. 실습할 때는 일본 기술자들도 친해지려 노력했고, 덕분에 많은 기술을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권상범 명장은 그곳에서 익혔던 기술을 접목해 향상된 품질의 빵을 만들었고, 덕분에 나폴레옹의 매출도 상승했다.

 

옛 리치몬드과자점 모습

명장이 된 이유

1979년, 권상범 명장은 나폴레옹에서 나와 ‘리치몬드’라는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오랜 시간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쌓아온 기술과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빵은 서서히 고객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 직접 배워온 ‘슈크림빵’은 겉과 속 모두 부드러운 맛을 자랑해 리치몬드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리치몬드의 성공,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엔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아쉬움의 이유는 ‘배움’이었다. 당시 공장장 대부분은 재료 배합 비율과 같은 기술을 후배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에 후배들은 어깨 너머로 보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이 점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던 권상범 명장은 ‘리치몬드 제과기술학원’을 설립했다. “후배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제과 제빵을 배우길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2002년, 제가 대한민국 제과명장에 이름을 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후배들을 양성해 제과 제빵 업계를 발전시키는 것 말이에요.”


2019년 2월 열린 리치몬드 제과기술학원 25기 정규반 수료식 모습

 

오늘도 배우는 중

매일 리치몬드 사무실에 출근하는 권상범 명장은 제과 제빵 관련 서적과 잡지들을 펼치며 새로운 트렌드를 공부한다. “운동과 공부는 평생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빠르게 변화하는 제과 제빵 시장을 파악하고자 매일 책을 봅니다. 제과 제빵 관련 해외 잡지까지 매달 챙겨 보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웃음).” 60여년이 흘렀지만 오늘도 배움을 위해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에서 절대 식지 않을 뜨거운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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