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최고가 되어야죠.”-대한민국 제과 명장 9호 홍종흔 명장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 2024-09-24 18:06:41
홍종흔 대한민국 제과 명장은 어느 분야에서건 ‘이왕 할거면 최고가 되자’는 마인드로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최고 권위자가 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당시 둘째 형이 빵집의 공장장으로 근무했는데, 여느 직장인보다 월급을 많이 받더군요. 형과 어머니를 설득해서 저도 학업 대신 혼자 서울로 상경해서 빵 공장에 취업을 했습니다. 서울에 ‘백장미 제과’라고, 종로구 시장통에 있던 빵집이었어요."
첫 직장에서의 생활은 그 당시 다른 기술자들이 그러했듯 다락방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 빵을 배우고, 늦은 밤 양잿물에 광목 행주를 삶아 널어 둔 후 자정이 넘어야 잠자리에 드는 쳇바퀴 생활을 이어갔다. 18살 홍종흔 명장은 4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생활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을 선택한 것은 본인이니, "고됨의 정도와 성공을 향한 속도는 정비례한다"고 매일 되뇌이는 게 하루 루틴 중 하나였다.
반죽 치는 공장장
1982년, 홍종흔 명장은 그 당시 업계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입성하고 싶어했던 ‘나폴레옹 과자점’에 입사한다. “나폴레옹에서 제5호 대한민국 제과 명장인 서정웅 명장님을 만났어요.” 이미 백장미 제과에서 기본기를 다졌다고 생각했건만 나폴레옹에서는 나폴레옹의 법을 따라야 했다. “서 명장님이 공장장이었는데 여간 꼼꼼한 분이 아니거든요. 뭐 거의 새로 다시 배웠다고 생각하면 돼요. 반죽서부터 식빵 잡는 것까지 모든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했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아 3년간 군복무를 마친 홍 명장은 다시 나폴레옹을 찾았다. 소위 ‘잘나간다’고 하는 기술자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홍 명장은 나폴레옹에서 만나는 선배 기술자들과 동료, 그리고 후배 기술자들이 가진 손기술, 마인드 등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그를 제과의 길로 이끈 둘째 형, 홍종식 셰프가 운영하는 ‘홍종식 과자점’으로 몸을 옮겼다.
‘가족끼리 더 한다’는 말이 있듯 홍종식 셰프는 동생에게 유독 엄격했다. 공장장의 직급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실수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신입 직원들 앞에서 욕을 듣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욕 먹는 게 죽기보다 싫더라고요. 그래서 누구 안 시키고 직접 반죽하고 빵을 구웠어요. 지금에야 분위기가 달려졌지만 20세기 한국 빵집, 공장장이 반죽 절대 안 쳤거든요. 저는 책임자, 심지어 훗날 ‘명장 홍종흔’ 오픈하고서도 단과자 반죽, 케이크 반죽, 빵 반죽 모두 직접 만들고 관리했어요. 하루는 누가 그러대요. 빵에 마약 넣었냐고, 너가 없으면 없는 티가 빵 맛에서 확 난다고. 그 자부심으로 일했어요. 덕분에 명장이 된 지금도 저 반죽 잘 칩니다. 그리니까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쉽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할 수 있는 거예요. 직원들은 싫어하겠지만요.”
국내를 넘어 세계로
2001년 2월, 홍종흔 명장은 드디어 본인의 매장을 오픈한다. ‘마인츠돔’이라는 상호를 건 베이커리는 서초구 잠원동에 1호점을 오픈했다. 사업에 전념할 법도 하지만 홍종흔 명장은 이제 비로소 세계대회에서 본인의 위치를 가늠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내 기술자에게 좋은 기준점이 될 수 있는 대회는 (사)대한제과협회가 주최하는 ‘서울국제빵·과자페스티벌(현 한국국제베이커리쇼)’이었다. 이미 1989년 초콜릿 부문에 참가해 금상을 수상한 이력을 보유했던 홍 명장은 2003년, 서울국제빵·과자페스티벌에서 동일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본격적으로 세계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프랑스 리옹에서 열리는 제과 월드컵, ‘쿠프 뒤 몽드 드 라 파티스리(Coupe du Monde de la Pâtisserie)’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홍 명장은 전년도 챔피언인 일본 노지마 시게루 셰프와 프랑스에서 파스칼 몰린스 MOF를 초청해 기술 연수를 했다. 물론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지만 이왕 나가는 거,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듬해 2005년, 그는 설탕 공예 선수로 출전해 ‘베스트 설탕 공예상’을 수상했다.
역대 최대의 성적이었다. 그리고 해당 제품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기술 공유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 당시 그가 공유한 건 기술뿐 아니었다. 한국도, 우리도 세계대회에서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도 함께 뿌렸다. “당시 우리 매장에서 일하던 정영택 셰프(현 제이브라운 대표)가 설탕 공예 교육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 일이 크게 동기부여가 됐는지, 독립해 제과학원을 차렸어요. 그 친구에게 배운 학생들도 지방으로 내려가 학원을 만들고요. 그렇게 10년 정도 지나니 전국적으로 학원이 많아졌습니다. 자연스레 학생들의 교육 접근성이 과거보다 좋아지게 됐지요.” 한국 학생들이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이유,
어쩌면 그 시작점에 2005년의 홍종흔 명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명장 홍종흔
제과기능장으로서의 기술력, 국제대회 입상을 통한 국위선양 및 국내 제과 기술에 대한 인식 재고, 그리고 전국 세미나를 통해 후학양성에 기여한 점 등을 인정 받아 그는 2012년 9번째 대한민국 제과 명장으로 선정된다. 홍종흔 명장의 제과 명장 선정은 국내 기술자들에게 또 긍정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다른 동료, 후배 기술자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준 것 같아요. 명장이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공부도 해야 하고 책도 써야 하고 봉사활동도 해야 하잖아요. 뜻하지 않게 학구열을 지피게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 업계가 상향평준화 됐고, 이후에 선정된 명장들의 세대가 젊어진 것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2015년 ‘홍종흔 베이커리’를 오픈한 그는 뒤이어 ‘골드헤겔’이라는 동탄의 랜드마크를 만들었다. 매장을 방문하는 동탄 시민에게 쉼의 공간이 되도록 조경, 플랜테리어에 힘썼고 2층에는 아쿠아리움을 설치했다. “커피, 빵 먹을 소소한 금액으로 이렇게 훌륭한 즐길거리를 제공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고객들의 말을 듣는 순간이 가장 뿌듯하다고 말하는 홍종흔 명장이다.
1층 한편에는 다양한 분야의 명장 작품들을 모아둔 전시 공간이 있다. (사)대한민국명장회에서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홍종흔 명장은 국내 기술인들의 장인정신이 인정받는 풍토를 만들고자 한다. “명장이라는 제도를 만든 이유도 장인들의 기술이 사장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도록 하고자 했던 거 아닙니까. 있는 자리에서 우리 명장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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