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사람이 일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술과 기계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이 업의 중심에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제과 명장 제17호 이석원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 2025-05-26 13:06:16
지난달,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랑콩뜨레’ 팝업스토어는 이석원 대한민국 제과 명장이 어떻게 일을 해왔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일주일간 진행된 행사에서 그는 선물용 제품을 찾는 고객을 겨냥해 2호 사이즈의 과일 케이크를 메인 상품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현장을 찾은 대부분의 고객은 여의도 직장인이나 지하철을 타고 방문한 ‘뚜벅이’ 손님들이었다. “케이크가 무겁다”,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석원 명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방산시장으로 향해 컵케이크 용기를 구입했고, 이튿날부터는 생과일 컵케이크를 새롭게 선보였다. 현장의 반응은 바뀌었다. 처음 계획에 없던 방향이었지만, 그는 흐름을 읽었고, 방향을 틀었다. 준비된 기술과 재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건 손님의 필요에 맞춰 움직이는 감각과 판단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은 그렇게 배웠어요.”라고 이석원 명장은 말한다. 제과업에 처음 발을 들여 ‘성심당’에서 일할 때도, 독립해 랑콩뜨레를 운영할 때도 그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일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엔 기술을 가르쳐준 선배들과 길을 열어준 성심당 임영진 대표가 있었다며 공을 자신보다 남에게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심당 키즈, 반죽 속에 길을 묻다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라도 빵집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91년, 논산공업고등학교 식품과 재학 중이던 이석원 명장은 그렇게 제과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하루에 버스가 6대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빵은 일상적인 간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방과 후 동네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어린 나이에도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당시 3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학원에 등록했다. 이후 제과기능사 자격을 따며 본격적인 기술자의 길을 밟았다. 그 출발선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험은 1993년, 19살의 나이에 대전 성심당에 실습생으로 입사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전이지만, 당시에도 성심당은 100명 가까운 생산 인력을 거느린 대형 제과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스승 김려숙 고문을 만난다. 조선호텔 초대 제과장을 역임한 김 고문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과,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하는 열정으로 이석원 명장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언젠가 저런 기술자,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일념은 그를 수많은 제과 대회로 이끌었다. ‘서울국제빵・과자전’, ‘캘리포니아 호두제품경연대회’, ‘하인즈 경연대회’까지, 출전한 대회마다 수상했고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도전해 2007년에 열린 ‘쿠프 뒤 몽드 드 라 파티스리’ 아이스 카빙 부문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대회를 준비하며 그는 진짜로 성장했다. 성심당에서 숙식하며 연습했고, 그 시간들은 기술 이상의 무언가를 몸에 새겨줬다. 이 모든 과정은 그를 주목한 임영진 대표의 전폭적인 신뢰 덕분이었다. 임 대표는 이석원 명장에게 스물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총괄 셰프를 맡겼다. 이 명장은 주인 의식을 갖고 일했고, 진취적이고 뚝심 있는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다.
특히 2005년, 옆 건물에서 시작된 화재로 성심당 본점 공장이 전소됐을 때, 그는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단 일주일 만에 공장을 복구해낸 일화는 그의 추진력과 책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것을 성심당에서 배웠고, 임영진 대표님을 아버지처럼, 김미진 이사님을 어머니처럼 따랐으니 성심당의 일을 내 일처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랑콩뜨레를 오픈할 때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시고 후원하신 걸 생각하면 아가페적 사랑이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위기를 견딘 마음, 발효되는 시간
2009년, 이석원 명장은 성심당을 떠나 경주에 랑콩뜨레를 열었다. 그는 성심당에서 빵 굽는 기술만 익힌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손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빵을 더 많이 팔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춤을 추기도 하며 고객과 소통했던 그 모든 경험을 품고 자신의 길을 내디뎠다. 덕분에 랑콩뜨레는 오픈 1년 만에 2호점을, 3년 만에 3호점을 낼 만큼 빠르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순항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만 평 규모의 허브 농장과 레스토랑을 더한 대형 베이커리 카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걸까.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회사는 위기를 맞았다.
그때, 뜻밖의 손길이 그를 붙잡았다. 거래처 사장들이 선뜻 거금을 빌려주고, 직원들은 적금을 깨 회사에 힘을 보탰다. “제가 잘 살았던 건지, 인복이 있었던 건지... 무언가를 돌려받으려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한 투자였더라고요. 위기의 순간에 그 마음들이 큰 힘이 됐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 그의 태도는 지금도 변함없다. ‘일학습병행제’를 통해 직원들의 전문학사 과정을 지원하고, 석박사 과정까지 이어지도록 응원한다. 그는 3%의 소금이 바다를 얼게 하지 않듯 3%의 인재가 조직을 바꾸고, 결국 회사를 살린다고 믿는다. 이런 철학은 고용노동부, 교육부 등 정부 부처가 함께 인증한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이라는 이름으로도 증명됐다.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한 믿음은 빵에도 그대로 닿아 있다. 그는 “빵의 기본은 발효”라고 말하며, 겉모양보다는 맛과 본질을 우선시한다. 랑콩뜨레는 자체 개발한 콩 유산균 발효종으로 모든 빵을 만들며, 소수의 취향이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빵을 구워낸다.
“뚝배기보다는 장맛이죠. 모양이 예쁘면 좋겠지만, 그건 두 번째 문제예요.”
명장의 어깨, 업(業)의 미래를 품다
2024년 8월 19일, 이석원 명장은 17번째 대한민국 제과 명장이 됐다. 그는 “30년 넘게 이 일을 해오며 살아온 인생을 국가로부터 검증 받은 것 같아 무척 기뻤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보다 앞서 한국제과기능장협회의 회장으로 업계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이 길 덕분에 가정을 이루고, 기능인으로 자리 잡고, 배 곯지 않게 잘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이 업계가 길이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입니다.”
3년 임기의 회장직을 수행하며 그는 업계의 내일을 고민했다. 스타 셰프를 발굴해 협회로 이끌고,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에게도 학습의 길을 열어주었고, 그 가운데 8명이 기능장이 되는 성과를 이뤘다. “제 발자취가 누군가에게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늘 검증된 길을 만들고 싶고, 함부로 살 수 없다는 책임감도 큽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10년 후, 제과업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이석원 셰프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사람이 일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구는 줄고 인건비는 오르니 기계화가 정답처럼 보일 수 있죠. 하지만 회사가 클수록 책임감을 갖고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그게 업계를 위한 길이고, 명장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해요.”
그의 말처럼 진정한 명장의 가치는 빵을 넘어 사람을 키우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오래도록 이어질 때, 제과 업계의 내일은 더욱 따뜻하고 단단해질 것이다.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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