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재창조될 능력을 가진 유기체입니다.”-대한민국 제과 명장 6호 김영모 명장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 2024-09-24 17:09:47
1982년 5월 오픈한 ‘김영모 과자점’은 올해로 42년이 되는 노포다. 어지간한 세월을 운영해 2세 경영에 들어간 노포 베이커리들의 1세대 창립주는 더 이상 생산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모 과자점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아직도 명장님이 빵을 만드냐는 질문들을 그렇게들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그럼 대한민국 명장이 빵 안 만들면 뭐하죠?’라고 되물어요. 한 제품이 상품화될 때까지 중요한 포인트들을 지속적으로 짚고 관리해주는 게 경영자이자 제과 기술자의 역할입니다.”
김영모 명장의 제과 이야기는 1970년 경북 왜관에서 시작한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집을 나온 17살 소년이 숙식을 하며 일할 수 있는 곳은 빵 공장뿐이었다. 왜관을 떠나 대구의 여러 빵집을 옮겨가며 한때는 방황하고, 그 끝에 결핵을 앓고, 절에서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본인이 정말 빵 만드는 직업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영모 명장은 이 때를 지독히 배고프고 서럽지만 언젠가 한국 최고의 제과 기능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던 시절이라 회상했다. 그리고 그 꿈은 현실이 됐다.
군 제대 후 서울로 상경한 김영모 명장은 그 당시 국내에서 가장 인정받고 있다는 장인이 있는 나폴레옹 과자점에 입사했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밤 10시가 되어야 끝나는 업무 스케줄 속에서도 새벽 2~3시까지 개인 연습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노력은 입사한 지 9개월이 되는 신입이 부공장장으로 급속 승진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기록했다.
지금에야 공장 냉장고나 벽에 당연히 붙어 있는 배합비는 그 당시 눈동냥으로 알아야 하는 1급 기밀이었다고 한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이지만 당시 업계 관행이었어요. 독립 이후 한국에서 빵집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이 억지로 한국인들에게 빵집을 넘기는 과정에서 생긴 악습이라고도 생각해요. 신격화된 공장장에게 모든 권한이 몰아져 있었던 분위기 역시 말입니다.” 김영모 명장은 나폴레옹에서 옮겨간 무교동 보리수 제과점에서 공장장이 되면서 이러한 관행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모든 배합비를 오픈하고 직원들이 물어보면 꼼꼼히 알려줬다. 기술자 한 명 한 명의 기술력 상승은 결과적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낳았다. 이 때 얻은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김영모 과자점을 오픈하고 1980년대부터 매년 해외로 연수를 갔어요. 다녀오면 사람들을 불러모아 공유하기에 바빴죠. 내 품을 떠난 내 배합비는 멋지게 변모해 다시 제게 돌아옵니다.” 3년의 시간을 들여 어렵게 터득한,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엔 생소했던, 직접 배양한 자연발효종 레시피도 완전히 공개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것을 빼앗기는 일이 절대 아님을 저는 잘 알아요. 기술 공유를 통해 전체적으로 빵 맛이 좋아지면 빵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좋아지며 자연히 많이 팔리게 될 테고, 제 고객들의 빵 소비 역시 늘어나게 돼 있거든요. 높은 곳에서, 멀리 봐야합니다.”
1970년대의 제과점이 시내에 위치해 만남의 장이 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1980년대부터 제과점은 주택가로 스며들며 동네빵집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김영모 과자점은 이 트렌드에 올라탔다. 1982년, 김영모 명장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주택가에 자리하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샤니나 삼립에서 양산하는 빵들과 윈도우 베이커리에서 생산하는 빵이 다르다는 것으로 맛으로 증명해보이기 시작했다. 인근에 쟁쟁한 빵집이 오픈을 해도 김영모 명장은 그들과 경쟁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와 싸웠다. 재료와 타협하지 않고 증명된 배합비를 통해 한결같이 나오는 김영모 과자점에 서초동 고객들은 ‘영며’들었고, 결국 터를 지켜냈다.
서초본점에 이어 도곡타워점 등 지점을 확장한 김영모 과자점은 현재 6개의 윈도우 베이커리와 베이커리 카페 ‘파네트리 제과명장 김영모’가 있다. “트렌드에 따라 유행하는 제품이나 영업 형태가 바뀌기도 하지만 오래된 제품을 소중히 관리하고 보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제품의 모체는 클래식 제품이에요. 빵과 과자는 한때 유행하고 사장되는 게 아니라 재창조될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김영모 과자점은 그동안 누적된 기술력을 잘 보관하는 곳이라 자부합니다. 뭐든 잘하는 곳이라는 걸 고객들도 인식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김영모 명장은 레시피와 기술력만 보관하는 게 아니었다. 김영모 명장이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참 흥미로웠다. “한국의 제과 박물관을 만들 겁니다. 예전에 해외 연수 때 기록했던 노트나 유로빵 같은 해외 박람회 입장권, 옛날에 썼던 계량 스푼 등 작은 것이라도 다 모아왔어요. 우리나라의 제빵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진화했고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 기록하는 아카이브가 될 겁니다. 문화재단도 등록했고 이천에 부지도 마련해뒀습니다.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 기대해요. 한두 해 걸릴 소사는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대한제과협회가 자가 회관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누가 생각했겠어요?”
*김영모 명장이 (사)대한제과협회 회장을 역임했을 당시 2005년, 모두들 안 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김 명장이 전국을 순회하며 모금한 8억 원으로 현재 대한제과협회 회관을 설립했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제과 박물관 건립이라고 말하는 김영모 명장의 눈이 빛났다. “명장님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대답은 없었던 것 같다.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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