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 빠지는 경험, 모두가 누리는 그날까지.”-대한민국 제과 명장 제11호 박준서

박혜아 기자 / 2024-12-30 11:41:49
박준서 명장은 본인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큰 충격이나 좌절, 배신감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자극은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켰고, 그 힘으로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외부 자극을 자양분 삼아 마침내 명장에 오른 박준서 명장. 1980년대 중반부터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박준서 명장의 40년은 국내 제과 제빵의 발전과 맥을 같이 했다.

“배고파서, 살기 위해서 빵 배웠다고 다들 그러죠? 슬프게도 너무 당연한 사실이에요. 70~80년대에 빵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다 그랬거든요. 우리도 그랬고, 우리 선배들도 그랬고.”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박준서 명장은 중학교 진학 후 단 하루 등교하고 이튿날 서울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고 회상했다. “14살짜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일만 시켜줘도 고마운데 먹여주고 재워준다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겠더라고요.” 그는 서울 상봉동과 성산동, 개봉동 등지의 빵집을 오가며 살기 위해 빵을 배웠다.


눈물 젖은 팝송

1987년, 박준서 명장은 오픈 멤버로 압구정에 개업한 ‘크리스탈 과자점’에 참여한다. 크리스탈 과자점의 고급화 전략은 1980년대 후반 당시 제과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곳은 버터크림 케이크 없이 오로지 생크림 케이크만 판매하며 강남 일대의 케이크 수요를 사로잡았다. 한편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열렸던 일본인 셰프 초청 세미나를 통해 일본의 제과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운 경험은 박준서 명장이 기술자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자기 삶은 없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밤 10시에 퇴근하는 ‘별보기 운동’ 쳇바퀴 삶은 그를 피폐하게 했다. “크리스탈의 생산량을 감당하려면 누군가는 두 시간 정도 일찍 나와서 반죽을 쳐놨어야 했어요. 제가 그 일을 나서서 맡아 한 겁니다. 쉬어갈 겸 검정고시를 치고자 퇴사했을 때 제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한동안 고생했다고 들었습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팝송이란 문화를 처음 접했다. 별만 보던 삶에서 별도 보는 삶, 그는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부족함을 인정하라, 성장의 동력

선배 기술자들은 종종 박준서 명장을 찾아왔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이 그 앞에서 “레시피 좀 달라”며 아쉬운 소리를 하니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콧대도 높아졌다. 이 세상 모든 빵을 다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충격을 준 일은 분당 오리의 ‘엠마-빠나미’에서였다. “엠마-빠나미에서 프랑스 셰프를 6개월 정도 고용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기술자들은 자연히 일을 보고 배웠죠. 근데 그 셰프가 빵을 만드는걸 보니 내가 그동안 알던 빵은 빵이 아니었던 거예요. 개량제를 넣는 게 아니라 발효종을 키워 빵을 만들더라는 겁니다. 진짜 바게트는 컨벡션 오븐에서 크게 부풀어 속이 꽉 찬 상태가 아니라, 데크 오
븐에 구워 균일한 기공을 가지고 있어야 했어요.” 그는 그날 이후 여유 시간이 생기면 프랑스 기술자 초청 세미나를 찾아다녔고,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일본과 프랑스를 오갔다. 처음 보는 케이크가 있다면 모두 구입해서 맛보고 해체하고 사진찍기를 반복했다.

앎에 대한 욕구는 그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꾸준한 대회 참가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본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제과 기술 트렌드를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제과 제빵대회에 참가해, 2001년과 2003년에는 ‘서울국제빵과자페스티벌(SIBA)’에서 연속해서 빵 부문 금상을 수상하고 2007년에는 ‘끼리크림치즈 경연대회’에서 같은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러한 수상 경력은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Fall in Bread

빵에 푹 빠져 있던 박준서 명장은 그에 꼭 맞는 이름의 프랑스 빵 전문점 ‘폴인브레드’를 오픈한다. 그가 보고 배운 진짜 프랑스 빵을 대중들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게트 반죽으로 팥빵을 만들고 호밀 반죽으로 고로케를 만들었다. 그러나 2010년 한국은 아직 프랑스 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무모한 도전이라며 수근거렸다. 어떤 노인 고객은 빵을 사간 지 20분 만에 돌아와서 박 명장에게 빵을 던지며 “이걸 먹으라고 만들었냐”면서 호통치기도 했다. 직접 만든 발효종으로 만든 빵이라 소화가 잘 될 거라는 설명도 소용없었다. 매일 버리는 빵이 수두룩한 탓에 음식물 처리 비용만 높아져갔다. 그러나 박준서 명장은 언젠가는 사람들이 프랑스 빵의 매력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정직하고 맛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씩 늘어나는 단골 고객, “한국에서 먹은 빵 중 너희 빵이 최고”라고 피드백하는 외국인 고객들은 그에게 버틸 용기를 줬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웨이팅 하는 빵집이 되어 있더군요. 많은 제과인들의 노력으로 사람들이 프랑스 빵에 대한 경계심을 허문 덕분일 거예요. 빵에 빠진 이들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 만든 이와 먹는 이가 모두 ‘Fall in bread(빵에 빠지다)’했다는 것. 그게 가장 기뻤습니다.”



폴인브레드의 성공과 더불어 더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박준서 명장은 대한민국 제과 명장에 도전했다. 그저 배우고자 했던 그간의 노력들이 그가 새롭게 목표한 도전에 큰 도움이 됐다. 마침내 그는 2016년 11번째 제과 명장에 올랐다. 그가 명장에 도전한 건 장학 사업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배움이 짧다고, 비빌 언덕이 없다고 무시당하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후배들이 없도록, 원한다면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싶었다 말한다. 한때 출연했던 유튜브 채널과 레시피 북 출간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명장이 쉽게 알려주는 제과 제빵’을 콘셉트로 사람들이 제빵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여러 문제가 얽혀 유튜브 채널과 ‘박준서 베이커리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만간 정상화하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다양한 통로로 명장이 나눌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을 전할 겁니다. 특히 빵에 빠졌던 경험을 꼭 나누고자 해요. 누구든 원하기만 한다면요.”

월간 베이커리 뉴스 / 박혜아 기자 hyeah01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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